생각/역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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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 남산뫼 학살 사건생각/역사이야기 2020. 9. 30. 18:20
시사인 680호, 정희상의 '괄호 속 현대사' 가운데에서 일부 "당시 정근욱씨는 함평군청에 신설된 정책개발담당관을 맡았다. 함평 학살 사건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직책이었다. 그는 함평유족회장까지 겸했다. 전국을 뛰며 권준옥 중대장을 수소문했다. 그 결과 권준옥이 1970년대 초 중령으로 예편한 뒤, 이름을 바꿔 정부산하기관에서 근무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지만 권준옥은 69세로 사망한 뒤였다. 그러나 끈질긴 노력 끝에 권준옥의 당시 연락병이 제주도에 살고 있다는 정보를 얻어냈다. 1990년대 후반 정근욱은 제주도를 들락거리며 두려움에 입을 떼지 않으려는 정 아무개씨(함평 학살 당시 일병)를 설득했다. 정근욱의 삼고초려에 감동한 정씨는 결국 입을 열었다. "12월 2일 한새들 전투 때 5중대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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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생각/역사이야기 2020. 9. 30. 18:08
시사인, 김형민, 나라를 망친 지도자들, 시사인 680호 "구한말 궁궐에서 오래 근무했던 정환덕이라는 이가 쓴 [남가록]이라는 비망록이 있다. 이 책에는 즉위초 고종의 에피소드 하나가 등장하지. 자신이 왕이 되어 만백성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쥐었다고 확인받는 순간 고종은 첫 어명을 내린다. 그런데 그 어명이 매우 황당했다. "우리 집 앞 골목의 군밤 장수를 죽여라. 그놈은 다른 애들 다 주면서 나한테는 공짜로 군밤을 준 적이 없다." 신하들이 기절초풍하여 "그래도 이건 아닙니다" 뜯어 말린 덕분에 군밤 장수는 횡액을 면했다고도 하지. ...."(56쪽) "고종은 자신의 신하들을 믿지 않았고 자기 백성들을 존중하지 않았다. 그가 갈망했던 것은, 그의 지위와 권리를 지켜줄 '더 확실한 힘' 외세였어. 전봉준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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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팔렌 체제 말기와 글로벌 자본주의생각/역사이야기 2015. 7. 27. 16:13
국민국가라는 것은 국경이 있고 관료제도와 상비군이 있고 국적과 귀속의식을 가진 국민을 구성원으로 하는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이 국민국가가 기본적인 정치단위로 등록된 것은 대략 4백년 전입니다. 정치사적으로 1648년에 성립된 베스트팔렌 조약이라는 탄생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그 이전, 즉 신성로마제국이 유럽을 지배하던 시대에는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의미에서 국민국가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네덜란드 영주와 카스테리아(스페인의 역사적 지역명) 여왕 사이에서 태어나 스페인 왕이 된 신성로마제국 칼 5세는 플랑드르에서 출생해 파리에서 살면서 프랑스어를 썼습니다. 그런 초영역적 권력이 유럽을 지배하던 시대가 17세기에 끝나고 대등한 주권을 가진 국가들이 자국의 국익을 위해 전쟁을 포함한 복잡한 외교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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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의 수용생각/역사이야기 2015. 7. 23. 09:50
북송 대의 신유학은 무신란(1170)이전에 이미 고려에 소개되었다. 그렇지만 주희가 집대성한 거으로 알려진 성리학의 본체는 1290년 무렵 안향이 원에서 주자서를 필사해 들여온 것을 계기로 백이정, 권부, 우탁 등 지배 엘리트들 사이에 구체적으로 소개되었다. 특히 백이정이 직접 원에 가서 성리학을 접하고 관련 서적을 구해 돌아와, 이를 이제현과 박충좌 등에게 가르침으로써 고려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1344년에는 남송의 성리학자들이 규정한 기본 경전인 사서가 과거 시험의 한 과목으로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이 일은 고려의 귀족 지식인들 사이에서 성리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다는사실과 더불어 성리학이 국가로부터 공인받았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지대하다.(중종의 시대, 계승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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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생각/역사이야기 2015. 7. 22. 16:27
성종 대 사림의 온상으로 알려진 양사에서 근무한 대간들 가운데 50% 정도는 공신 가문 출신이고, 나머지도 성종대 이전부터 주요 관료를 배출해온 명문거족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사림의 상징으로 알려진 조광조는 고조부가 건국 초 이른바 삼공신에 책봉되었으며 증조,조,부 모두 대대로 한양에서 벼슬을 지냈으니 서울의 쟁쟁한 공신 가문이자 명문거족 출신이었다. 또한 사림의 종장으로 알려진 김종직은 영남 지역 출신이지만, 중앙 정계에서 그가 보인 행적은 세조의 찬탈을 적극 도운 신숙주와 한명회 등과 절친하게 교육하는 등 오히려 훈척에 가까웠으며 상당한 부호이자 부재지주였다. 이뿐 아니라 사림의 거두로 널리 알려진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이황, 이이 등도 하나같이 경향 각지에 걸쳐 막대한 노비와 전택을 보유한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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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파에 대한 학계의 통설생각/역사이야기 2015. 7. 22. 15:18
사람파에 대한 학계의 통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사림파는 훈구파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대개 향촌에 기반을 둔 중소 지주로서 유향소나 향청을 통해 지방 사족의 이해관계를 대변했고 길재의 학통을 이어 성리학적 소양을 갖추었으며, 사장보다는 경학을 더 중시했고, 15세기 후반부터 꾸준히 중앙 정계에 진출해서는 대개 삼사에 포진해 현ㅅ닐 정치를 비판하면서 기존의 훈구세력과 대립했고, 연이은 사화로 피해를 입기는 했으나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결국 권력을 장악했다. 조선 전기, 특히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에 이르는 정치사를 서술하면서 신구 대립을 강조한 연구나 인물 중심의 당쟁사 시각에서 접근한 서술은 일찍이 있었으나 사람파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한 이는 이병도였다. 그는 조선 전기 지식인 사회의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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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조선 국왕의 자리생각/역사이야기 2015. 7. 10. 11:28
중종은 조선왕조의 11대 국왕인데, 이는 달리 말하면 중종 이전에 모두 열 명의 군왕이 권좌에 앉아 조선을 다스렸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열 명의 군왕 가운데 태조, 정종, 단종, 연산군 등 무려 네 명이 타의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났다. 이는 중종 이전에 권좌에 앉은 왕들 가운데 무려 40%에 달하는 수치로, 조선 건국이후 왕좌가 얼마나 불안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15세기 조선국왕의 자리가 얼마나 불안했는지....고려와 조선을 연속선상에 놓고 보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고려가 몽골제국의 간섭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났다고 할 수 있는 14세기 후반만 보더라도 공민와, 우왕, 창왕, 양왕 등 네 명이 모두 타의에 의해 왕좌에서 물러났으며, 또한 전부 살해당했다.(중종의 시대, 계승범, 역사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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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조선의 모습생각/역사이야기 2015. 1. 9. 22:50
당시의 일반적인 기록으로 보자면 1호당 평균 6인을 치고 있는 것이 일반적 경향입니다. 그러나 정부의 호적 문서에 나타난 것을 보면 대략 4인이 1호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일년간 소비하는 식량과 조세 등을 감안한다면 이들은 적어도 2결 내외의 토지를 가져야 합니다. 이들은 삼정 체제하에서 전정을 납부해야 하고 군정을 짊어져야 했고, 또한 환곡에 따르는 각종 부담을 짊어져야 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일년 동안 먹고 정부에서 요구하는 조세에 응하는 정도만을 순수 계산을 한다 하더라도 2결 정도의 토지가 필요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19세기 토지 소유관계에 대한 연구 결과를 참고해 보자면 1결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사람은 부농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체 인구의 70% 이상이 1결 미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