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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주의자 나치(넥서스, 398~402)생각/책읽기 2025. 3. 16. 12:04
수천년 동안 철학자들은 더 높은 목표에 부합합하지 않아도 되는 궁극적인 목표의 정의를 찾으려고 시도했다. 그들은 두 가지 접근법에 반복적으로 끌렸다. 이 둘은 의무론과 공리주의라는 철학 용어로 잘 알려져 있다. 의무론자deontologist('의무'를 뜻하는 그리스어 데온deon에서 유래했다)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어떤 보편적인 도덕적 의무, 또는 도덕 법칙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법칙은 더 높은 목표에 부합하는 대신 내재적 선(그 자체로 좋은 것)에 의존한다. 만일 그런 법칙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런 법칙을 컴퓨터에 프로그래밍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컴퓨터 네트워크가 선한 힘이 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재적 선'이 정확히 무슨 뜻일까? 내재적으로 선한 법칙을 정의하려고 시도한 가장 유명한 사람은 클라우제비츠와 나폴레옹의 동시대 사람인 이마누엘 칸트였다. 칸트는 내재적으로 선한 법칙이란 나 자신이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고 싶은 모든 법칙이라고 주장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누군가를 죽이기로 작정한 사람은 일단 행동을 멈추고 다음과 같은 사고 과정을 거쳐야 한다. '나는 지금 사람을 죽이려고 한다. 나는 '사람을 죽여도 된다'는 보편적 법칙을 만들고 싶은가? 그런 보편적 법칙이 생긴다면 누군가가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살인을 허용하는 보편적 법칙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나도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 쉽게 말하자면, 칸트는 오래된 황금률인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마태오의 복음> 7:12)를 재구성한 것이다. (정언명령 '네가 하고자 하는 행동이 보편적인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를 뜻함-옮긴이).
'우리 각자는 다른 모든 사람이 이렇게 행동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은 간단하고 당연한 생각처럼 들린다. 하지만 철학이 다루는 추상적인 사고 영역에서 훌륭하게 들리는 아이디어가 역사의 냉혹한 현실로 이주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른다. 역사학자들은 칸트에게 무엇보다 이렇게 물을 것이다. 보편적 법칙에 대해 말할 때 당신은 '보편적'을 정확히 어떻게 정의하는가? 실제 역사적 상황에서 누군가가 살인을 저지르려 할 때 가장 먼저 밟는 단계는 그 피해자를 인류라는 보편적 공동체에서 배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위라투 같은 반로힝야 극단주의자들이 바로 그렇게 했다. 불료 승려 위라투는 분명 신도들에게 인간을 죽이지 말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보편적 법칙이 로힝야족을 죽이는 데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로힝야족은 인간 이하의 존재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이하 중략)
사고실험으로, 이마누엘 칸트와 아돌프 아이히만이 만났다고 상상해보자. 참고로, 아이히만은 자신을 칸트주의자로 여겼다. 아이히만이 유대인을 실은 또 한 대의 열차를 아우슈비츠로 보내는 명령에 사인할 때 칸트가 아이히만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수천 명의 인간을 살해할 작정이오. '인간을 살해해도 된다'가 보편적 법칙이 되어 괜찮소? 그렇게 되면 당신과 당신 가족도 살해당할 지도 모르오." 아이히만이 대답한다. "아니, 나는 수천 명의 인간을 살해하려는 것이 아니오. 나는 수천 명의 유대인을 살해하려는 거요. '유대인을 살해해도 된다'가 보편적 법칙이 되어도 괜찮으냐고 묻는 거라면 나는 그렇다고 말하겠소. 나와 내 가족은 이 보편적 법칙으로 인해 죽임을 당할 위험이 없소. 우리는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이오."
이 때 칸트는 아이히만에게 "어떤 존재를 정의할 때는 항상 가장 보편적인 정의를 사용해야 한다"고 대답할 수 있다. 어떤 존재를 '유대인' 또는 '인간'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보편적인 용어인 '인간'을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나치 이데올로기의 핵심은 유대인이 인간임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유대인은 인간이 아니라고 하면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유대인은 동물이기도 하고, 유기체이기도 하다. 동물과 유기체는 명백히 '인간'보다 더 보편적인 범주이므로, 칸트의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이면 우리는 극단적인 비건의 입장을 취하게 된다. 우리는 유기체이니, 어떤 유기체도, 심지어는 토마토나 아메바조차 죽이면 안 되는 걸까?
역사를 돌이켜보면 대부분까지는 아니라도 많은 분쟁이 정체성의 정의와 관련되어 있다. 누구나 살인이 나쁘다는 것을 인정하나, 내집단 구성원을 죽이는 것만 '살인'에 해당하고 외집단의 누군가를 죽이는 것은 살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집단과 외집단은 상호주관적 현실이고, 이를 정의하는 기준은 대게 어떤 신화다. 따라서 보편적인 합리적 법칙을 추구하는 의무론자들은 흔히 어떤 지역적 신화의 포로가 된다.
의무론의 이 문제는 우리가 보편적인 의무론 법칙을 인간이 아닌 컴퓨터에게 적용할 경우 특히 심각해진다. 컴퓨터는 유기체도 아니다. 그렇다면, 컴퓨터가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라는 법칙을 따를 때 인간과 같은 유기체를 죽이는 것에 대해 염려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죽임을 당하고 싶지 않은 칸트주의자 컴퓨터는 '유기체를 죽여도 된다'는 보편적 법칙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유기체가 아닌 컴퓨터에게 그런 법칙은 위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기체가 아닌 컴퓨터는 죽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을지 모른다. 우리가 아는 한 죽음은 유기적 현상이며 비유기체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고대 아시리아인들이 문서를 '죽읻나'고 말했을 때 그것은 은유에 불과했다. 하지만 컴퓨터가 유기체보다 문서에 더 가까운 존재이고 그래서 '죽임을 당하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면, 칸트주의자 컴퓨터는 인간을 죽여도 된다는 결론에 이르지 않을까?
컴퓨터가 무엇을 신경 써야 하는지 정의할 때 우리가 어떤 상호주관적 신화의 늪에 빠지지 않을 방법이 있을까? 가장 확일한 방법은 컴퓨터에게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존재에 신경 써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특정 지역의 상호주관적 신화를 믿음으로써 고통이 발생하는 경우가 흔히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 그 자체는 보편적인 현실이다. 따라서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기준으로 내집단을 정의하는 것은 도덕성의 근거를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현실에서 찾는 것이다. 자율 주행 자동차는 불교도든 무슬림이든, 프랑스인이든 이탈리아인이든 관계없이 인간을 죽이지 말아야 하며, 개와 고양이, 그리고 언젠가 존재할지 모를 지각 능력이 있는 로봇도 죽이지 말아야 한다. 이 법칙을 더 세분화하여 자율 주행 차에게 각각의 존재를 고통을 느끼는 능력에 비례하여 배려하도록 지시할 수도 있다. 만일 자율 주행 차가 인간을 죽이는 것과 고양이를 죽이는 것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고양이를 치어야 한다. 고양이가 인간보다 고통을 덜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방향으로 가다보면 우리는 의도치 않게 의무론 진영을 버리고 그들의 경쟁자인 공리주의 진영으로 가게 된다.
본문의 생각의 흐름
의무론적 윤리이론, 칸트의 보편적입법의 원리, 정체성의 문제, 보편적 존재 정의, 유기체의 먹고 먹히는 관계의 문제, 컴퓨터(비유기체)의 등장, 고통을 느끼는 존재라는 기준, 고통의 비교선택의 문제, 공리주의적 접근(의무론적 접근의 전통적 반대 입장)
생각해볼 문제
불교의 가르침은 인간이 고통을 겪는다는 데서 출발한다. 사성제(고, 집, 멸, 도). 유기체 대 비유기체(컴퓨터 또는 네트워크망) 세계에서 불교의 가르침을 새롭게 볼 수 있지 않나? 고의 원인이 집인데, 동물은 인간에 비해 집이 훨씬 덜 한 듯 보인다. 포유류 동물이 새끼를 키울 때는 집이 있는 것 같은데, 크면 미련없이 떠나보내는 것을 볼 때, 그런 것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간단한 다세포 동물이나 식물의 세계로 가면 고는 여전히 있는 것 같지만, 집은 글쎄...없는 것 같다.
컴퓨터는 고가 없는 것 같은데, 고통을 느끼는 또는 학습을 통해 고통을 느낄 수 있는(고통을 아는?) 로봇이 등장할 수도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