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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자갈, 모래(어쩌다 가방끈이 길어졌습니다만, 전선영, 꿈의지도, 2019)이야기/좋은 이야기 2023. 7. 19. 23:34
어느 금요일, 미팅 시간보다 약간 일찍 S교수님 방에 갔다. 난데없이 방 안에서 기타 치며 노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게 무슨..."
놀라서 방 번호를 다시 확인했다. 분명 교수님의 방이 맞았다. 잠깐이긴 했지만 나 역시 중학생 때 밴드에서 드럼을 쳤던 영혼인지라(성적이 수직 낙하하는 바람에 결국 드럼 금지령이 떨어졌다. 그 후로 영영 밴드로 돌아가진 못했지만), 귀가 솔깃했다. 미팅이 끝나고 슬쩍 여쭤봤더니 오후에 팟캐스트 녹음이 있다고 하셨다. 교수님 두 분이 일주일에 한 번 팟캐스트를 녹음하셔서 발행하신다는 걸 그날 처음으로 알았다. 퇴근하는길에 다운로드받아 들어보니, <노인 학대화 응급의학의 역할>, <좋은 죽음이란 과연 없는가?>, <자발적으로 음주를 멈추는 방법> 등 본인들의 전문 분야와 관련된 이야기를 일반인들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만든 팟캐스트다. 오프닝은 매주 S교수님의 기타 반주에 맞춰 가볍게 노래를 하는 걸로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아까 교수님은 녹음을 앞두고 잠시 기타 연습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S교수님을 관찰하는 것은 재미있다. 랩 미팅 때 교수님의 생각의 촉이 얼마나 날카롭게 벼려져 있는 지도 보았고, 토론을 이끌고 정리하시는 것을 보면서 감동하기도 했다. 한편으로 교수님은 열정적인 사이클리스트이자, 워리어스(이 지역의 NBA 농구팀)의 열렬한 팬이기도 하다. 거기다 팟캐스트까지 하면서 어떻게 열 명이 넘는 멘티들을 지도하는 게 가능하고, 저명한 학술지에도 논문을 척척 게제하시는 거지? 그 비결이 뭔지 밀찰 취재라도 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얼마 전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외 다수의 책을 남긴 작가이자 세계적인 신경의학자였던 고 올리버 색스의 자서전 <온 더 무브>를 읽었다. 그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올리버 색스는 지금의 나와 비슷한 나이에, 나처럼 영주권이 없는 외국인 신분으로 미국에 와서 샌프란시스코에 잠깐 산 적이 있었다. 색스는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학교 캠퍼스에서 인턴 생활을 하고 학회를 다녔다. 그가 자신의 우상이었던 올더스 헉슬리와 아서 쾨슬러를 만난 것도 바로 이 캠퍼스였다. 자신의 우상들이 보여준 경이로운 정신력, 재치와 인간애에 젊은 색스는 깊이 감동하였고, 그 감동을 죽음을 앞둔 50년 후에도 기억하고 있었다. 한편, 그 바쁜 생활을 하면서도 색스는 시간이 나면 밖으로 나갔다. 1번 국도를 따라 1,000킬로미터씩 바이크를 탔다. 북캘리포니아의 삼나무 숲을 지나고 요세미티와 데스밸리를 돌아다녔다.(원서 <온 더 무브>의표지는 올리버 색스가 청바지에 가죽 잠바를 입고 아주 잘 빠진 바이크에 기대어 있는 사진이다. 웬만한 청춘 영화의 주연 배우 뺨치는 포스다) 똑같이 24시간을, 같은 공간에서 사는데 어떻게 나랑 이렇게 다르게 살 수가 있냐고. 나는 매일 헉헉대느라 바쁜데.
예전에 온라인에서 봤던 어는 노교수님의 강의(Rocks, Pebbles, Sand)가 생각난다. 교수님은 강의실에 큼직한 돌멩이가 꽉 차 있는 유리 항아리를 들고 들어와서 물어보셨다.
" 이 항아리가 가득 찼나요?"
학생들은 "네!"라고 대답했다. 그때 교수님은 작은 자갈들을 가져오셔서 가득 찬 줄로만 알았던 그 항아리에 넣으셨다. 자갈들이 큼지막한 돌멩이 사이를 메우면서 들어갔다. 교수님은 다시 물어보셨다.
"이제 이 항아리가 가득 찼나요?"
학생들은 "네!"라고 대답했다. 교수님은 마지막으로 모래를 가지고 오셔서 더 이상 공간이 없는 것 같았던 항아리에 넣으셨다. 돌멩이와 자갈 사이사이를 모래가 꽉 메웠다. "항아리가 가득 찼나요?"라고 교수님이 물으셨을 때 학생들은 또 다시 "네!"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교수님은 "이런 방식으로 여러분의 삶을 채우기 바랍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일단 당신에게 중요한 것(=돌멩이)을 최우선시해서 먼저 당신의 삶(=항아리)을 채우세요. 그리고 좀 덜 중요한 것들(=자갈)로 삶의 남은 공간들을 메우세요. 가장 작고 하찮은 것들(=모래)은 맨 나중에 넣어도 결국 다 들어가게 되지요. 처음부터 작고 하찮은 것들(=모래)로 삶을 채우면 가장 중요한 것들을 채울 수 있는 공간이 남질 않아요"라고. (이하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