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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맘대로 "올해의 칼럼" 2편
    이야기 2010. 12. 31. 08:13

    [야! 한국사회] 아듀 2010, 아디오스 보온병 / 우석훈
    한겨레
    » 우석훈 2.1연구소 소장
    눈에 가득 찬 세상을 보며 한 해를 보낸다. 우리 모두는 눈만 보면 마냥 행복했던 시절이 있지 않았는가? 2010년을 보내면서 기억나는 사건이 몇 개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 정말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일을 하나만 꼽는다면 <에스비에스> 드라마 ‘시크릿 가든’을 꼽고 싶다.

    현빈이 들고 있던 많은 책들, 특히 오래된 시집들이 한국에 다시 열풍을 몰고 왔다. 우리가 지금 왜 시를 읽을까? 물론 현빈이 좋아서다. 그렇다. 원래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동경하고, 그와 같이 되고 싶어서 시집을 드는 그런 존재다. 10년 전, 우리는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와 함께 새로운 10년을 열었다. 인간의 사회에서 인간이 주인이 아닌 경제, 그렇게 토건경제와 신자유주의, 경쟁 속으로 우리를 밀어넣었다. 새롭게 시작되는 10년, 여전히 ‘양아치’들은 “돈이 최고”라고 외치고 있지만, 시집을 들고, 시가 가득히 꽂혀 있는 책장을 동경하는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10년을 맞게 되었다. 어쩌면 다가오는 10년, 보온병은 다시 보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2010년, 우리 곁으로 사회과학이 돌아왔고, 시가 돌아왔다. 마이클 샌델을 읽으면서, 왜 우리는 한국 저자의 책을 읽지 못하는가, 그런 아쉬움이 있었다. 그 허전함을 결국은 장하준이 채워주었다. 그렇다면 시는? 이 마지막 아쉬움마저 현빈이 채워주었다. 4대강 사업은, 시를 잃어버린 시대에 생겨난 지옥이다. 시를 읽고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연 대개조’ 같은 소비에트식 동원경제가 가능할 리 있을까? 힘을 숭상하고 규모를 사랑하던 지난 10년, 우리는 아파트에 몸을 담고, 명품에 영혼을 담고, 토건에 경제를 담그고, 자식들은 조기유학을 보냈다. 그래서 생겨난 괴물이 ‘명박 시대’ 아닌가? 결국에는 국민들이 다시 시집을 읽고, 흔적 없이 사라져버렸던 ‘문학소녀’와 ‘문청’,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다시 돌아와야 이 고통스러운 삽질의 시대가 문을 닫는다.

    지금의 한국, 정부는 없고, 깡패만 있다. 형님대군의 통치하에서 국고는 ‘룸’에서 작당질하는 ‘치사빤쓰’들의 속지갑이 되었고, 경찰과 검찰, 얘들은 ‘부당거래’고, ‘공의’는 불도저 위에 세워진 ‘친환경 건설 새만금’ 입간판이 되었다. 국민들이 시집을 다시 손에 드는 걸 보면서, 나는 이 ‘작당질 정권’을 만든 한나라당의 유통기한이 끝나가는 걸 보았다. 다음 대선, 우리가 질 리가 없다. ‘삽질 대통령’의 시대, 시집과 함께 끝나간다. 시집은 이 시대 최고의 불온문서인데, 다행인 것은 보온병과 불도저들은 절대 시집을 읽지 않아서 국민들이 오래된 시집을 다시 손에 들기 시작한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모른다는 점이다. 장하준의 책을 ‘국방부 불온문서’로 지정한 저 무지막지한 자들도 시집 따위는 검열하지 않는다. 참 다행이다.

    “때리지 않고 어떻게 학생을 가르칠 수 있느냐?” 이렇게 말하는 우파들, 걸핏하면 사람을 때리는 재벌 2세들, 현빈만큼만 해라. ‘빈부 격차’ 때문에 여전히 교복을 입혀야 한다는 사람들, 그런데 그들은 대개 빈부 격차 덕분에 ‘보온병’이 대표가 된 정당에 투표하는 사람들 아니던가? 때리지 않는 학교에서, 교복 없고 두발규제 없는 2011년이 온다면, 우리의 다음 10년은 희망적이다. 교복 없는 한국, 사교육 없는 세상, 조기유학 없는 한국, 이런 희망들을 향해 2011년을 연다. 그 새로운 시대를 현빈이 지금 열고 있다. 2011년, 우리 모두 시집 딱 12권만 읽자. 그러면 한나라당의 시대, 확실히 마감할 수 있을 것 같다. 쥐가 고양이를 이길 수 없듯이, 불도저는 시집을 이기지 못한다. 아디오스 보온병!

    우석훈 2.1연구소 소장


    [김정운의 남자에게] 폭탄주의 문화심리학
    한겨레
    » 김정운 명지대 교수,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폭탄주는 대한민국 남자들이 자랑하는 음주문화다. 세상에 그렇게 자랑할 게 없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폭탄주 제조법의 다양함과 화려함은 서구의 칵테일문화를 뛰어넘는 세계 최고 수준의 상상력이다. 섞어 마시기에 한번 맛을 들인 사내들은 이제 어떤 종류의 음료수든 죄다 섞어 버린다. 그런데 참 궁금하다. 도대체 왜 한국 남자들은 이토록 폭탄주에 열광하는 것일까?

    간단하다. 빨리 취하고 싶어서다. 그럼 왜 빨리 취하려고 하는 걸까? 서로 할 이야기가 없어서다. 술은 서로 이야기하려고 마시는 것이다. 맨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알코올의 힘을 빌려 허심탄회하게 나누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한국 남자들의 탁자 위에는 술만 있지, 서로 나눌 이야기가 없다.

    폭탄주가 한두 바퀴 돌아가다 보면 꼭 오버하는 인간이 나타난다. ‘사랑해!’ ‘우리가 남이가!’ ‘마셔마셔’ 어쩌구 하며, 껴안거나 러브샷과 같은 과도한 스킨십을 일삼는다. 이 인간은 동석한 모든 이가 빠짐없이 폭탄주를 마시도록 강요한다. 그러고는 가장 먼저 취해 아까 한 이야기, 하고 또 한다. 맨정신으로 듣고 있자면 정말 환장한다. 폭탄주의 끝은 참 스산하다. 온갖 종류의 ‘위하여!’를 남발하고, 넥타이 머리에 묶고 탁자 위에서 춤추는가 싶더니, 한순간에 모두 사라진다. 끝까지 남아 있는 사람이 술자리의 모든 뒤끝을 정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술값을 책임져야 하거나, 망가진 이들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한다.

    도대체 왜들 그럴까? 두렵기 때문이다. 서로 나눌 이야기가 전혀 없는데, 멀뚱멀뚱 마주보고 앉아 있어야 하는 그 황당한 상황을 견디기가 너무 힘들어 폭탄주를 마시는 것이다. 모두 눈동자가 흐릿해지고, 서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마구 헷갈리는 상황을 만들어야만 마음이 편해진다. 왜 이렇게 술을 마셔야 하는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부터 이런 식은 아니었다. 기쁜 우리 젊은 날, 우린 서로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소주 한 병에 파전 한 접시를 앞에 놓고 밤새 이야기했던 날들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인간은 이야기하려고 산다. 생각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하려고 생각한다. 그래서 비고츠키 같은 러시아의 심리학자는 생각을 ‘내적 언어’(inner speech)라고 정의한다. ‘내가 나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생각이라는 것이다. 혼자 중얼거리는 현상은 이 내적 언어가 은연중에 튀어나오는 것이다. 힘들면, 생각이 복잡하면, 외로우면 사람들은 중얼거린다. 이야기가 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러기 아빠들은 죄다 혼자 중얼거린다. 내 친구 재림이도 매번 혼자 중얼거린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삶의 의미를 부여한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울수록 하소연할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은 심리상담의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내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삶의 의미를 찾아낼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은 유능한 상담자의 필수 덕목이다.

    한국 남자들이 술만 먹으면 군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청춘의 그 아름다운 날들을 철조망 앞에서 총을 들고 보내야 했던 그 이유가 도무지 설명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땅의 모든 여자들은 심리상담자의 자세로 남자의 군대 이야기를 들어줘야 한다. 특히 군대에서 ‘보름달 빵’과 ‘베지밀’ 내기 축구시합 한 이야기는 끝까지 들어줘야 한다. 이 땅의 진정한 사랑은 군대 이야기를 참고 들어주는 것이다.

    내 이야기가 없다는 것은 내 삶에 의미부여가 안 된다는 뜻이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어도 내 이야기가 없으면 행복할 수 없다. 내 이야기를 해야 한다. 술 한 잔 놓고도, 아니 맨정신으로도 가슴 설레는 내 삶의 이야기를 밤새 나눌 수 있어야 진짜 내 삶이다. 그래서 폭탄주를 습관적으로 마시는 사람이 행복해지기란 참 어려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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