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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행학습, 하려면 제대로 알고 하라” [시사인 103호]
    이야기 2009. 9. 11. 05:19

    학부모·학생에게 선행학습은 이미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그런데 학원 처지에서 선행학습은 또 어떤 의미일까? 전·현직 학원 관계자들이 속내를 털어놓았다.
    [103호] 2009년 08월 31일 (월) 11:39:08 김은남 기자 ken@sisain.co.kr
    아이를 학원에 보내는 학부모들이 목매는 것 중 하나가 선행학습이다. 선행학습으로 인해 성적이 오르는 것은 일시적인 ‘착시효과’에 불과하다는 연구 논문이 쏟아져도 요지부동이다. 그런데 학원에서는 어떨까? 학부모·학생이야 그렇다 치고 공급자인 학원 처지에서 선행학습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최근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개최한 ‘선행학습 3회 연속 국민 대토론회’(8월12~26일)에서는 전·현직 학원 관계자들의 속내를 들을 수 있는 드문 자리가 마련됐다. 공급자의 생각을 읽어야 똑똑한 소비자가 될 수 있는 법. 선행학습, 하더라도 제대로 알고나 하자는 이들의 육성을 들어보았다.

       
    2008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사교육을 받는 가장 큰 이유가 선행학습(59.9%) 때문이다.
    가장 먼저 포문을 연 이는 교육평론가 이범씨였다. 잘나가는 전직 학원강사였던 이씨는 선행학습이야말로 ‘대한민국 사교육 업계가 개발해낸 매우 성공적인 기획 상품’이라고 규정했다. 선행학습하겠다는 학생들이 늘어나면 학원으로서는 ‘누이 좋고 매부 좋고’이다. 돈 벌 기회가 늘어서 좋고, 무엇보다 학생 관리하기도 편하다고 이범씨는 말했다. 학원 진도가 학교보다 처지면 학생 관리가 어렵다. 학교 수업을 잘 따라간 아이에게는 심화풀이를, 못 따라간 아이에게는 보충학습을 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원 진도가 학교를 앞서가면 학원 입지가 훨씬 유리해진다. 어차피 모든 학생이 학원에서 해당 내용을 ‘난생처음’ 배우게 되는 만큼 학생을 고르게 관리할 수 있다.

    이해웅 (주)타임교육 입시연구소장은 “사실 냉정하게 따져볼 때 선행학습이 필요한 학생은 최대한 잡아도 상위 10% 정도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사교육 시장이 나머지 90% 학생까지 선행학습으로 유도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것이 ‘좋은 상품’이어서가 아니라 ‘가장 돈이 되는 상품’이어서라는 것이다. 일단 학원에서 볼 때 선행학습은 저비용 고효율 상품이다. 중등 과정을 그대로 적용하면 초등학생을 위한 선행 과정이 되니 콘텐츠를 따로 개발할 필요가 없다. 중등부 강사가 초등부 가르치면 되니 일석이조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스터디코드 조남호 대표는 복습이 최고의 선행학습이라고 주장했다. 그때그때 배운 내용을 충분히 소화하는 심화학습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결과를 책임질 일이 없는 것 또한 학원으로서는 매력이라고 전직 학원강사 정원일씨(사교육걱정없는세상 간사)는 말했다. 선행학습의 경우 길게는 2~3년을 학교 진도보다 앞서가는 만큼 학교 시험을 통해 이를 검증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이를 가늠할 잣대는 학원 자체 시험(레벨 테스트, 정기고사)뿐이다. 정씨에 따르면 수강생을 장기간 ‘홀딩’하는 데도 선행학습은 매우 효과적인 도구다. 평범한 아이들에게 현행 학교 진도를 몇 달~몇 년씩 앞서가는 선행학습은 버거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수업을 따라가기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학원에 더 의존하게 되는 것이 선행학습의 역설이라는 것이다

    선행학습은 사교육업계 최고의 기획상품


    선행학습을 강조하면 할수록, 10% 상위권 학생을 위한 몰아주기 수업을 할수록 학원 브랜드 가치는 올라간다. 한때 수강생 1000여 명을 거느린 유명 학원 원장이기도 했던 이해웅씨는, 중하위권 고1 학생 100여 명을 따로 뽑아 후행학습(전에 배운 것을 정리해 현재 진도까지 배우는 학습)을 실시한 경험이 있다. 고1인데 “I-my-me-mine”을 이해하지 못하는 녀석들을 붙들고 몇 달을 씨름했다. 나중에는 학원강사가 과로로 쓰러질 정도였다. 결과는 만족할 만했다. ‘살아남은’ 30명 중 이른바 SKY대 진학생도 나왔다. 그러나 이씨는 결심했다고 한다. 다시는 이런 프로그램을 진행하지 않기로. 학원으로서 이는 돈도 되지 않으면서 너무나 힘이 드는 장사였다. 학부모도 이를 원치 않는 듯했다. 학부모가 자기 아이 수준은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특목고 많이 보낸 학원’ ‘전교 1등이 다니는 학원’을 선호한다고 이씨는 꼬집었다. 10%를 위한 들러리가 될지언정 중위권 학원에는 눈도 돌리지 않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
    타임교육 이해웅 소장은 사교육 시장에서 선행학습이 주류인 이유는 간단하다고 말했다. ‘좋은 상품’이 아니라 ‘잘 팔리는 상품’이어서라는 것이다.
    전직 강사 출신 참석자들과 달리 이해웅씨는 현직 학원 관계자, 그것도 선행학습을 선도하는 유명 특목고 입시학원 간부라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자해’가 될 수도 있는 부담을 무릅쓰고 이씨가 학원가의 이런 내막을 공개한 까닭은 무엇일까? “고2, 고3에 가서 꺾이는 아이들을 너무 많이 보아서였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 학생과 학부모를 지배하는 신념이 하나 있다. ‘현재 진도를 하는 것은 내신 때문이고 입시나 수능을 위해서는 선행학습을 해야 한다’는 신념이 그것이다. 그 때문에 고1 국어는 대충 내신 공부만 하고 수학 선행학습에 목숨을 거는 아이도 많다. 그랬다가 고3 때 언어영역 성적이 나오지 않아 뒤늦게 학원 두세 개를 몰아 다닌다. 이씨가 보기에, 이는 고1 때부터 교과서에 나온 시나 소설을 꾸준히 읽고 교과 연계 독서를 했으면 충분히 해결됐을 일이다.

    조남호 스터디코드 대표 또한 그때그때 심화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많은 학부모가 “지난 학기는 잊어버리고, 다음 학기에 승부를 보자!”라는 식인데, 인생살이 면에서는 ‘과거를 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가 맞겠지만 공부에서 이는 위험천만한 발상이라는 것이다. 공부만은 어떤 분야보다 과거 지향적이어서, 과거의 개념을 확실히 해두지 않으면 그 어떤 선행학습을 해도 미래가 불투명해진다는 조씨는 ‘매니저 엄마’들에게 이렇게 충고하고 싶다고 말했다. “선행학습은 백해일익, 무용지물이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있었다. 이범씨는 선행학습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구조적 요인에 먼저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장 선행학습 없이는 특목고 입시나 난이도 높은 수능시험에 대비하기 어렵다. 여기에다 대학 서열화와 학벌주의로 인한 선발 경쟁, 그리고 ‘획일적 교육’과 ‘무책임 교육’으로 상징되는 학교 관료화 같은 한국 교육의 고질적 문제까지 겹치면서 상위권이 아닌 학생들까지 선행학습에 내몰리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이런 구조가 엄존하는 한 선행학습을 통해 단 몇 등이라도 올리고 싶어하는 학부모들의 선택은 합리적 행동일 수 있다고 이씨는 지적했다.

    선행학습과 하이힐 선호 현상에는 비슷한 데가 있다는 것이 이해웅씨의 진단이다. 척추에 아무리 안 좋다고 떠들어도 하이힐을 신는 여성들이 존재하듯 훗날 정말로 공부를 망칠 수 있다고 아무리 경고해도 학부모·학생들은 선행학습을 선택한다. 또 한 가지 유사점은 그에 따른 만족도 후회도 소비자가 져야 할 몫이라는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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