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림
성종 대 사림의 온상으로 알려진 양사에서 근무한 대간들 가운데 50% 정도는 공신 가문 출신이고, 나머지도 성종대 이전부터 주요 관료를 배출해온 명문거족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사림의 상징으로 알려진 조광조는 고조부가 건국 초 이른바 삼공신에 책봉되었으며 증조,조,부 모두 대대로 한양에서 벼슬을 지냈으니 서울의 쟁쟁한 공신 가문이자 명문거족 출신이었다. 또한 사림의 종장으로 알려진 김종직은 영남 지역 출신이지만, 중앙 정계에서 그가 보인 행적은 세조의 찬탈을 적극 도운 신숙주와 한명회 등과 절친하게 교육하는 등 오히려 훈척에 가까웠으며 상당한 부호이자 부재지주였다. 이뿐 아니라 사림의 거두로 널리 알려진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이황, 이이 등도 하나같이 경향 각지에 걸쳐 막대한 노비와 전택을 보유한 부호이자 부재지주였다. 당대에 이미 가장 대표적인 사림파로 인정받은 조광조 일파(기묘사림) 및 현량과 인물들 또한 대개 서울의 명문거족 출신이었다....
그러면 사림은 왜 그렇게 당시의 정치에 비판적이었을까? ..유교적 가치를 국시로 정하고 출범한 새 왕조 조선의 정치 현실은 결코 유교적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비록 훈척 집안의 자제라 해도 그가 지작이 있는 젊은이라며 학교 교육과 독서를 통해 습득한 유교적 가치와 눈앞에 보이는 피로 얼룩진 정치 현실과의 괴리에서 오는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사림이 훈구와 확연히 대별되는 새로운 사회경제적 계층이었다면 정권이 교체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거나 그 정권 교체 과정에서 대지주인 훈구 세력을 겨냥한 토지개혁 등의 혁명적 조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건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중종의 시대, 계승범, 역사비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