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림파에 대한 학계의 통설
사람파에 대한 학계의 통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사림파는 훈구파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대개 향촌에 기반을 둔 중소 지주로서 유향소나 향청을 통해 지방 사족의 이해관계를 대변했고 길재의 학통을 이어 성리학적 소양을 갖추었으며, 사장보다는 경학을 더 중시했고, 15세기 후반부터 꾸준히 중앙 정계에 진출해서는 대개 삼사에 포진해 현ㅅ닐 정치를 비판하면서 기존의 훈구세력과 대립했고, 연이은 사화로 피해를 입기는 했으나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결국 권력을 장악했다.
조선 전기, 특히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에 이르는 정치사를 서술하면서 신구 대립을 강조한 연구나 인물 중심의 당쟁사 시각에서 접근한 서술은 일찍이 있었으나 사람파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한 이는 이병도였다. 그는 조선 전기 지식인 사회의 구도를 도표로 그리고, 정치와 학문 성향에 따라 크게 훈구파, 절의파, 사림파, 청담파 등 네 그룹으로 구분해 설명했다. 그는 특히 영남 사림파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사림파를 지역에 기반을 둔 특정 세력으로 파악했다. 또한 사화를 훈구파와 사림파가 충돌한 결과로 풀이함으로써 해방 이후 국내 한국사학계에서 전개된 사림 관련 논의의 단초를 사실상 열었다.
1971년에 출간한 개설서에서 이기백은 이병도와 이인영 등이 제기한 기존 설명을 수용하면서도,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을 지역 ㅣㄱ반과 토지 기반의 차이로 설명함으로써 그 둘의 계급적 차이를 더욱 부각했다. 하지만 구체적이 예증을 시도하지 않은 점에서는 이인영의 기술과 큰 차이가 없다.
바로 이듬해인 1962년 이상백은 진단학회에서 출간한 한국사:근세조선전기편에서 연산군 이래의 정치사를 훈구와 사림의 대립이라는 구도로 상세하게 기술했다.토지 소유 기반의 문제를 강조하지는 않았으나, 사림을 조직이나 세력으로 분명히 규정함으로써 조선 전기의 정치사를 훈구와 사림의 이항 대립으로 보는 설명 틀을 더욱 명료하게 체계화했다.
개설서의 가설 수준에 지나지 않던 사림파 학설을 연구논문으로 뒷받침한 첫 학자는 이태진이다. 그는 1972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중소 지주층인 영남 지역의 사림파가 김종직을 필두로 유향소를 다시 세우려는 운동 등을 통해 중앙의 훈구파와 대립했으며, 중앙집권에 맞서 향촌 자치를 강조하고 성리학을 이론적 사상적 기틀로 삼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논문 전체에 걸쳐 시종일관 사림파와 훈구파를 대립 구도로 보았으며, 그들의 차이를 성리학에 대한 태도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기반의 차이로 설명했고, 나중에 사림파가 훈구, 척신 세력을 압도하게 된 상황을 중소 지주층의 승리하고 단언했다. 그러나 훈구와 사림의 토지 소유가 어떻게 달랐는지를 논증하지 못한 결정적인 약점을 드러냈다. -중종의 시대, 계승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