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주디스 허먼, 열린책들)
트라우마는 성폭력과 가정폭력 피해자와 20여년 동안 함께 해온 연구와 임상 작업의 결과이다.
지난 세기에 세 번 특정한 심리적 외상이 공공의 의식 위로 표면화되었다. ..첫번째로 등장한 외상은 여성의 전형적인 심리 장애인 히스테리아였다. ....두 번째는 탄환충격 혹은 전쟁 신경증이었다.....최근 공공의 의식에 떠오른 마지막 외상은 성폭력과 가정폭력이다.
(트라우마에는 프로이트의 심리학에 대한 매우 중대한 비판이 담겨있다. 요약하자면, 1. 트라우마를 겪는 여자들에게는 공통된 경험이 있다. 2. 프로이트는 아동기의 성적 학대가 여성들의 히스테리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3. 그런데 히스테리를 겪는 여자들이 너무 많아서 프로이트는 실제로 그런 일이 너무 많다고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여자들이 만들어내는 환상이라고 보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4. 프로이트는 환상을 선택했고, 이 환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욕망-무의식의 길로 나아갔다. 만약 그가 히스테리아를 실제 경험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받아들였다면 20세기 위대한 통찰이라는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래는 그 내용과 관련된 본문을 옮긴 것이다.)
자네와 프로이트 모두 히스테리아의 신체화 증상을 설명하면서 이것을 기억으로부터 추방당한 매우 고통스러운 사건이 위장되어 표현된 것이라고 하였다.
실타래를 가장 멀리 따라간 사람은 프로이트였고, 이는 어김없이 그를 여성의 성적 삶에 대한 탐색으로 이끌었다. ...기억의 실타래를 따라가면서 프로이트와 그의 환자들은 히스테리아 증상을 촉발한 가장 근래의 상대적으로 작은 경험들 아래 숨겨져 있던 아동기의 중요한 외상 사건들을 들추어내었다. 1896녀에 이르러 프로이트는 자신이 히스테리아의 원천을 찾아냈다고 믿었다. 18개의 사례 연구로 이루어진 "히스테리아의 원인론Ther aetiology of Hysteria"이라는 제목의 보고에서, 그는 극적인 주장을 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히스테리아에 관한 모든 사례의 밑바탕에서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지나치게 이른 성적 경험"이 발행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 발생은 아동기 초기에 일어난 것이고 수십 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이 방해하고 있지만 정신분석을 통하여 밝혀질 수 있다. 나는 이것이 신경 병리학에서의 카푸트 닐리를 발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만큼 중요한 발견이라고 믿는다."
.... 1년이 지나지도 않아서, 프로이트는 히시테리아의 기원에 놓인 임상 이론을 비공식적으로 거부하였다. 프로이트의 애응은 그의 가설이 담고 있는 급진적인 사회적 함의에 스스로 계속 불편해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히스테리아는 여성에게 너무 흔한 것이었고, 만약 그의 환자들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그리고 그의 이론이 정확하다면 "아동에 대한 도착 행위"라고 말한 것은 만연해 있는 무엇이 되어 버린다. 그가 처음 히스테리아 연구를 시작한 파리의 프롤레타리아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자신이 개업의로 일하고 있는 빈의 존경받는 부르조아 가족들 사이에서도 아동 학대가 빈발한다고 결론지어야 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절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도적히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딜레마에 빠진 프로이트는 여성환자에게 귀 기울이기를 그만두었다. 이 전환점은 그 유명한 도라의 사례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도라의 분노와 모욕감을 수용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러한 착취 상황이 그녀의 욕망의 충족인 것처럼, 그녀의 에로틱한 흥분을 탐색하려고 하였다. 프로이트가 어떤 행위를 복수로 해석하자 도라는 치료를 그만두었다.
...정신분석은 환상과 욕망의 내적 순환에 관한 연구가 되었고 경험의 실제성과 단절되었다. 1910년에 이르러 프로이트는 히스테리아 환자들이 겪은 아동기 성학대가 사실이 아니라고 결론지었지만 환자들의 호소가 거짓이라는 어떠한 임상적 기록도 제공하지 앟았다. "이러한 유혹의 장면은 전혀 일어난 바가 없으며 그것은 내 환자가 만들어낸 환상일 뿐임을 마침내 확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