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학교 없애기가 없어졌으면 좋겠다.
경쟁력 그리고 효율성.......
영덕교육청이 최근에 계획하고 있는 ‘적정규모 학교육성’이라는 이 모호한 이름을 달고 있는 일을 저지하기 위한 일을 시작하면서 계속 되뇌게 되는 말입니다. (우선 ‘적정규모 학교육성’이라는 이름은 ‘작은 학교 없애기’라는 이름으로 바꾸는 것이 그야말로 적정하겠습니다.)
행정당국이 작은 학교를 없애려는 이유를 다시 한번 따져보아야겠습니다. 그들은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운영함으로써 학생들의 학습권을 보장하고 올바른 인격형성과 사회성 함양을 위해 추진”(영덕지역 적정규모 육성 시범학교 추진계획(안)/영덕교육청 에서)하고 있다고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1.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운영함으로써’ 라고 입을 떼면서 작은 학교에서는 정상적인 교육과정이 운영되지 않은 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이 말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다만, 작은 학교에만 국한해서 말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지적입니다. 큰 학교든, 작은 학교든 형식적인 교육과정은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자아실현이라는 교육의 목적에 비춰볼 때 우리의 교육이 지식축적, 그것도 출세를 보장해 주는 대학진입을 위한 입시준비에 필요한 지식축적에 갇혀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고등학교는 물론이거니와 중학교, 초등학교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정은 비슷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큰 학교든, 작은 학교든 교육과정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혹시 작은 학교가 큰 학교와 비교해서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운영하는데 좀 더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없앨 일이 아니라 정상적이 되도록 힘써야할 일입니다.
2. ‘학생들의 학습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학습권이라는 말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학습권이 말 그대로 권리라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지켜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학생들은 사는 곳이 어디든, 사는 형편이 어떠하든 모두 똑 같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어째서 자기가 사는 마을에 있는 가까운 학교를 뒤로 하고 차로 한 시간도 넘는 먼 길을 매일같이 갔다가 다시 차 시간에 맞춰 와야 하는 불편함을 겪어야만 겨우 자신의 학습권을 보장받게 되나요?(그것도 열 살, 열 두 살 된 어린이가 말입니다.) 어째서 작은 학교는 불편한 시설에서 복식수업과 같은 어려운 조건을 감수해야만 하나요? 학생이 단 한 명이라도, 우리가 ‘학습권’을 권리로서 말한다면, 정상적인 예산과 정상적인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노력이 뒤따라야 합니다.
3. ‘올바른 인격향상과 사회성 함양을 위해서’ 라면 마땅히 작은 학교를 살려야 합니다. 인격이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통해서 키워집니다. 사회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개인은 집단의 한 일원으로 간주되고 그래서 개성이 숨겨지는 것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학생과 학생이, 교사와 학생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알아가는 데서 인격과 사회성이 함양된다는 점에 동의한다면, 작은 학교는 오히려 더 좋은 환경입니다.
그래서 작은 학교는 교육이라는 말의 제대로 된 뜻에 따라, 없애야 할 것이 아니라 살려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돈일 겁니다. 오늘날 돈의 다른 이름은 경쟁과 효율입니다. 경쟁은 ‘좀더 돈을 벌어보자’는 말이겠고, 효율은 그러기 위해서 ‘돈 되는 곳에 돈을 쓰자’는 말이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돈을 벌어서 어쩌자는 건지 이걸 꼭 생각해 봐야 합니다. 작은 것이 큰 것과, 느린 것이 빠른 것과 경쟁한다면 무엇이 이기겠습니까? 착함이 약삭빠름과 다툰다면 또한 누가 잃는 쪽이 되겠습니까?
가지고 누리는 이들은 당대에 자기가 가지고 누리는 것도 모자라, 자기 자식들을 유학 보내고, 학원에 보내고 거금을 들여 과외를 받게 합니다. 경쟁과 효율의 원리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경쟁과 효율은 그들에게 유리한 규칙입니다. 하지만 유리한 것도 잠깐일 따름입니다. 황금 손을 가진 어느 임금이 손대는 것 마다 금으로 바뀌어 좋아하다 결국 굶어 죽게 된다는 이야기가 신화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공교육을 위해서 세금을 내고 정성을 들이는 것은 공교육이 모두를 위한 교육이어야 할 뿐 아니라, 공정한 것이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경쟁이 없을 수 없으나 그 경쟁은 공정한 것이라야 합니다. 그래야 그 경쟁의 결과를 수긍할 수 있겠지요. 프랑스의 교육이 목적하는 바 가운데 하나는 계급이 재생산되는 것을 막는 것이라 합니다. 사회적 지위를 자신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경쟁해서 얻어야 할 텐데, 그것과 무관하게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자식이 그 지위를 이어 받는 것을 막기 위해서 프랑스는 초등교육, 중등교육, 대학교육을 막론하고 모두 무상으로 제공합니다. 경쟁을 하려면 이 정도는 돼야 제대로 된 경쟁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사회가 너무나 오랫동안 경쟁의 논리에 따라 작동되다 보니 모든 일에 다 경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경쟁에서 낙오하면, 실패자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작은 학교를 없애겠다는 계획이 밑바탕에 두고 있는 생각이 무서운 것은, 어른들의 세계만 아니라 아이들의 세계도 그렇게 되고 말 것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미래는 암담합니다.
얼마 전에 이오덕 선생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 분이 남긴 시입니다.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았나?
고양이 한 마리도 주워 오지 못했다.
아이들을 살린다는 핑계
아이들은 어떻게 살렸나?
사람을 살려서는 뭘 하자는 건가?
모든 것을 죽이고 스스로 죽고 말 사람을.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아있나?
병아리 한 마리, 매미 한 마리 살리지 못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