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이야기
농촌교육의 위기와 선택
비숲
2007. 9. 28. 15:00
이 글은 2001년도에 쓴 글입니다.
며칠 전에 농성장에 왔다가 의성 지회장님과 만나 나눈 이야기를 같이 나누고 싶다.
이아기는 처음에 중초임용문제로 시작되어 초등교육의 전문성으로 옮아갔다가 결국엔 농촌교육의 문제로 귀결되었다. 그분의 이야기는 초등교육의 전문성, 사실 초등교육만 아니라 모든 교육의 전문성이 그러하여야 할 것인데, 논의의 처음과 끝은 '아이에 대한 전문성'이고 현재의 교사양성기관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교육논리가 '아이에 대한 관심과 이해'에 중심을 두지 않고 국가의 논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젖혀놓은 채 이루어지는 모든 교육 논의는 헛것이라는 것이었다.
교육이 목적하는 바가 '사회적 신분 상승'과 '성공적인 자본주의사회 진입'이라는 타자의 논리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농어촌의 교육은 이중으로 실패하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피폐한 농촌의 사회문화적 여건으로 해서 기왕의 '사회적 신분 상승'과 ' 성공적인 자본주의사회 진입' 경쟁에도 실패하거니와, 그것이 자기의 논리가 아니라 타자의 논리이기 때문에 그 속에 살고 있는 아이들의 기본적인 자활능력을 키우는 데도 실패한다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농어촌의 현실이 이렇게 암울함에도 오히려 거기에 새로운 희망을 거는 그분의 다짐이다. '다 포기하자.'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는 그 사회적 지위가 신분에 따라 결정되는 정치적 억압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사회적 투쟁의 결과인데 이것은 바로 각 개인의 능력에 의해 지위가 획득되는 사회이며, 이 사회의 구성원을 생산해 내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근대교육제도이다. 그러나 이 근대적 합의-자유와 평등에 바탕을 둔 국가의 제한을 넘어서려는 자본의 힘은 이른바 '신자유주의'를 앞세워서 정치와 경제, 마침내는 교육에서까지 공공성을 몰아내고 개인의 능력에 따른 경쟁이 아니라 자본력의 경쟁으로 교육을 시장화 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공교육의 위축과 사교육 시장의 팽창 현상의 정체이다. 불행하게도 사회적 연대와 투쟁의 역사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우리 사회는 이 구조를 바꾸려는 노력 대신에 좀 형편이 된다 싶으면 이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농촌의 경우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경제적 근거였던 정부추곡수매제 마저도 기대할 수 없게 되었고 내후년에 밀어닥칠 쌀시장 개방이 본격화되면, 경제적 기반이 없는 그러나 노동력을 가진 인구는 도시하층으로 이동하고 농촌에는 그야말로 최후의 사회적 약자들, 어디에도 갈 데 없는 노약자와 어린이, 장애우.....만 남게 될 것이다. (이 경우에도 살아남는 농촌 인구가 있어 농촌 안에 부촌과 빈촌이 새로 형성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경우에도 과연 살아남은 자들은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돈과 권력이라는 물신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한 경쟁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불안과 열등감, 그리고 썩지 않는 시체뿐이다.
'아이에 대한 관심과 이해'는 그러므로 전혀 다른 교육정책과 전혀 다른 교육과정과 전혀 다른 우리의 선택을 요구하는 말이다. 번지르르하게 입에 발린 교육학적 수사로 치장하고 오로지 그것만으로 교육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관료들의 교육정책, 그들을 전면에 내세워놓고 기득권을 더욱 강화하고 확장하려는 세력들이 제공하는 이데올로기; 현실에서 전혀 힘을 얻지 못하는 전통적인 덕목, 껍데기뿐인 수사로만 존재하는 도덕 사이에 교묘하게 배치되어 있는 맹목적인 기능주의, 매몰찬 개인주의, 경쟁과 소비를 미화하는 자본주의인 교육과정; 인간화교육을 주창하면서도 대도시로 옮기기 위해 농촌지역을 떠나는 조합원 교사들을 그냥 바라만 봐야 하는 건 슬픈 일이다. 국가기구의 논리를 까발기고 부당한 국가기구와 싸우는 것 못지 않게 우리 자신의 입신출세주의, 성공주의, 가족이기주의와 싸워야 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그럼 아까 이야기한 그 선생님의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
단순하고 소박한 삶.
어차피 이 사회에서 성공하지 못할 바엔 그들의 방식을 버리고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그 길이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나눔으로 더 여유로운 삶을 향해 가는 길이라면......
더 이상 잃을 것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면 돌아서는 일은 오히려 쉬울 것이다.
그래, 여기에 그 희망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 길은 과연 그럴 것인가? (이렇게 묻는 것은 내가 앞으로 더 나갈 수 있다고 보고, 더 나가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런 체험이 없기 때문인가?)
게다가 나는 그래도 잃을 것을 많이 가진 편인 것 같은데......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며칠 전에 농성장에 왔다가 의성 지회장님과 만나 나눈 이야기를 같이 나누고 싶다.
이아기는 처음에 중초임용문제로 시작되어 초등교육의 전문성으로 옮아갔다가 결국엔 농촌교육의 문제로 귀결되었다. 그분의 이야기는 초등교육의 전문성, 사실 초등교육만 아니라 모든 교육의 전문성이 그러하여야 할 것인데, 논의의 처음과 끝은 '아이에 대한 전문성'이고 현재의 교사양성기관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교육논리가 '아이에 대한 관심과 이해'에 중심을 두지 않고 국가의 논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젖혀놓은 채 이루어지는 모든 교육 논의는 헛것이라는 것이었다.
교육이 목적하는 바가 '사회적 신분 상승'과 '성공적인 자본주의사회 진입'이라는 타자의 논리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농어촌의 교육은 이중으로 실패하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피폐한 농촌의 사회문화적 여건으로 해서 기왕의 '사회적 신분 상승'과 ' 성공적인 자본주의사회 진입' 경쟁에도 실패하거니와, 그것이 자기의 논리가 아니라 타자의 논리이기 때문에 그 속에 살고 있는 아이들의 기본적인 자활능력을 키우는 데도 실패한다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농어촌의 현실이 이렇게 암울함에도 오히려 거기에 새로운 희망을 거는 그분의 다짐이다. '다 포기하자.'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는 그 사회적 지위가 신분에 따라 결정되는 정치적 억압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사회적 투쟁의 결과인데 이것은 바로 각 개인의 능력에 의해 지위가 획득되는 사회이며, 이 사회의 구성원을 생산해 내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근대교육제도이다. 그러나 이 근대적 합의-자유와 평등에 바탕을 둔 국가의 제한을 넘어서려는 자본의 힘은 이른바 '신자유주의'를 앞세워서 정치와 경제, 마침내는 교육에서까지 공공성을 몰아내고 개인의 능력에 따른 경쟁이 아니라 자본력의 경쟁으로 교육을 시장화 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공교육의 위축과 사교육 시장의 팽창 현상의 정체이다. 불행하게도 사회적 연대와 투쟁의 역사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우리 사회는 이 구조를 바꾸려는 노력 대신에 좀 형편이 된다 싶으면 이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농촌의 경우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경제적 근거였던 정부추곡수매제 마저도 기대할 수 없게 되었고 내후년에 밀어닥칠 쌀시장 개방이 본격화되면, 경제적 기반이 없는 그러나 노동력을 가진 인구는 도시하층으로 이동하고 농촌에는 그야말로 최후의 사회적 약자들, 어디에도 갈 데 없는 노약자와 어린이, 장애우.....만 남게 될 것이다. (이 경우에도 살아남는 농촌 인구가 있어 농촌 안에 부촌과 빈촌이 새로 형성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경우에도 과연 살아남은 자들은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돈과 권력이라는 물신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한 경쟁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불안과 열등감, 그리고 썩지 않는 시체뿐이다.
'아이에 대한 관심과 이해'는 그러므로 전혀 다른 교육정책과 전혀 다른 교육과정과 전혀 다른 우리의 선택을 요구하는 말이다. 번지르르하게 입에 발린 교육학적 수사로 치장하고 오로지 그것만으로 교육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관료들의 교육정책, 그들을 전면에 내세워놓고 기득권을 더욱 강화하고 확장하려는 세력들이 제공하는 이데올로기; 현실에서 전혀 힘을 얻지 못하는 전통적인 덕목, 껍데기뿐인 수사로만 존재하는 도덕 사이에 교묘하게 배치되어 있는 맹목적인 기능주의, 매몰찬 개인주의, 경쟁과 소비를 미화하는 자본주의인 교육과정; 인간화교육을 주창하면서도 대도시로 옮기기 위해 농촌지역을 떠나는 조합원 교사들을 그냥 바라만 봐야 하는 건 슬픈 일이다. 국가기구의 논리를 까발기고 부당한 국가기구와 싸우는 것 못지 않게 우리 자신의 입신출세주의, 성공주의, 가족이기주의와 싸워야 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그럼 아까 이야기한 그 선생님의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
단순하고 소박한 삶.
어차피 이 사회에서 성공하지 못할 바엔 그들의 방식을 버리고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그 길이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나눔으로 더 여유로운 삶을 향해 가는 길이라면......
더 이상 잃을 것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면 돌아서는 일은 오히려 쉬울 것이다.
그래, 여기에 그 희망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 길은 과연 그럴 것인가? (이렇게 묻는 것은 내가 앞으로 더 나갈 수 있다고 보고, 더 나가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런 체험이 없기 때문인가?)
게다가 나는 그래도 잃을 것을 많이 가진 편인 것 같은데......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