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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말에는 냄새가 배어 있는데, 정의라는 말에는 피냄새같은 게 배어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정의를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어떤 것으로 보거나 반대로 정글의 법칙 처럼 강자의 이익이라고 보는 것 같다. 실제로 정의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지 아니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인지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기는 해도, 어느 쪽을 택하든지 간에 정의라는 이 말을 쓸 때에는 뭔가 약자의 입장을 전제하고 들어가는 것 같다.
이 말을 강자가 쓸 때에도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야 하면 자기도 거기 따라야 할 것이고,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야 하고 대놓고 하면 좀 재수가 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약자의 입장에서는 정의라는 말을 많이, 대놓고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잘난 넘들은 정의같은 말을 쓰는 걸 싫어하고, 대신 밥을 열심히 이야기하고 다니는 것 같다. 정의가 아니라 밥이 문제야. 대운하, 비즈니스 프렌들리, 영어몰입교육......
권력은 항상 역사를 왜곡하게 마련인데 어떻게 역사에서 정의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역사에서 정의를 찾는 쪽과 감추려는 쪽의 싸움에서 대체로 지는 쪽은 정의파 쪽인데, 죽기도 많이 죽고 대대로 제대로 배우지도 못해 무식과 가난이 대물림되기 일쑤일텐데도 정의가 죽지 않고 살아남는 까닭이 무엇일까. 정의는 역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건가.
정의라는 말을 처음 듣게 된 것은 고등학교 사회 선생님으로부터였던 것 같다. 전쟁나면 다 도망갔다가 이 땅을 떠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피흘려 지키고 나면, 다시 돌아와 떵떵거리며 살 것이라는 앞뒤가 잘린 채 기억되는 그 말이 그 후로 이중국적을 가진 넘들이 장관이 되거나 애 낳으러 미국간다는 말을 들으면 문득 되살아난다. 그리고 이제는 이 땅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륀지와 밥을 얻으러 잘도 이 땅 저 땅 돌아다니는 그들의 꽁무니를 좇아 다니느라 여념이 없다. 선착순 1등은 다음번 뺑뺑이에서 빼주던 교련수업을 받던 그 학교 교정에는 학도병 전사자 기념비가 있었다.
스러져가는 것과 우는 것들, 사라져 가는 것들과 정의라는 말은 그리웁게도 가깝운 사이다.